W
@mu19ver
2024. 1. 6. 01:04친애하는,
죽음의 관전자가 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나? 죽음의 주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야. 너희처럼 불완전한 것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죽음의 주체가 되겠지만. 원래 관전자가 된다는 건 근시안적인 사고로는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다.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죽음의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것이 필멸의 결론이지. 봐라. 너조차도 그 주체가 되지 않았나?
내게, 닿지도 않을 말을 글자로 정제하는 꼴까지 만들면서 말이다.
갈레말에 태어난 것들이라면 모두 친지를 잃을 것을 확신하는 겨울이었다. 내가 그 몸을 선택했을 첫 해에 부는 바람과 같았지. 서서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폐 속에 성에가 끼는 계절임에도 네 소식은 빠르게도 퍼지더군. 숨이 다한 자리에 모여든 이들이 누구였는지는 굳이 내가 이를 필요도 없을 거다. 너 자신 가장 잘 알겠지.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그 쌍둥이 엘레젠이었다. 행방도 모르던 영웅을 기쁘게 만나러 올 수 없다는 것이, 가장 가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킬 수 없었다는 사실이 그 쌍둥이의 한이 되겠지. 어지간히 못되지 않았나? 그 세검이 바닥에 떨어지고 하릴없이 읊어진 치유의 주문이 흩어지는 꼴을 예상하지 못하진 않았을 텐데.
마법이라고는 조금도 쓰지 못하는 남자와 별을 탐구하기로 마음먹은 남자가 찾아왔을 때 네 숨이 완전 지상으로 흩어진 후였다. 네 주변으로 내린 서리에 한몫할 정도는 되겠더군. 한갓 백 년도 살지 못하는 자들의 상실이 감히 우리의 상실에 비견될 바 있겠느냐만은, 너를 향한 상실에 보이는 그 감정까지 부정하지는 않겠다. 너라면 짐작할 수 있겠지. 실제로 본 적 있을 테니까. 두 번째는 어떻게 견뎌낼지 궁금하군. 너희들은 한 번은 대개 버티지만 두 번째는 견뎌내지 못하던데. 다음을 기약할 수 없어서인가? 아니면 위대한 선을 향한다는 목적을 이해하지 못해서? 하긴 그랬다면 조디아크를 일구어낸 우리를 존중할 줄은 알았겠지. 미련하고 불완전한 것들.
그 마도사는 탄식과 울음이 웅덩이처럼 고일 때 도착했지. 그러나 침착함을 추모로 삼는 자들도 있다. 더 나아가 앞을 준비하는 자들도 있지. 추론 이후에 확신을 늘어놓던 마도사의 첫 마디가 기억나는군. 위로 한 마디 없이 선고되던 그 말 말이야. ‘언젠가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죠.’ 그 한 마디가 네 마지막을 바다 위의 도시로 인도하기 시작했다. 마치 그 말이 기폭제가 된 것처럼.
슬픔에 머물러 있어서는 마무리를 지을 수 없다는 듯이.
……불쾌하군. 하이델린도, 네놈들도.
바다 위의 도시는 여전했다. 느리고 침잠한 에테르가 느껴졌다는 것은 미리 일러두지. 너는 감정의 흐름에 둔하니 감사하는 것이 좋을 거라 생각하지만. 하긴 고작 키스에 도망치던 네가 뭘 알겠다고.
하지만 너의 장례에 대해서는 확신이 있었겠지. 보아라. 땅과 연결되어 춤사위로 말하는 자들이 왔다. 라자한에서, 메느피나의 문양과 네 무기를 형상화한 문양을 한가운데 그리고, 그 끝자리는 은색으로 장식한 푸른 공단을 들고서……. 그 뒤를 따라 수정으로 담금질한 몸을 가지고 있던 거울 세계의 옛 지도자가 따라왔다.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만, 이렇게 말하면 네가 죄책감이 좀 들지도 모르겠군. 그럴 리는 없겠지. 그랬다면 네가 죽음 앞에서……. 아니, 됐다. 무슨 의미가 있겠나.
그자가 울 것 같은 표정을 억지로 펴고 웃었을 때, 그 얼굴이 이 자리에 찾아든 이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지. 별로 알고 싶지는 않지만 말이야.
악단의 소리가 들려온다. 마치 축제라도 되는 것처럼. 날은 맑고, 추모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 자리에는 너에게 받은 것을 돌려줄 수 없는 자들뿐이다. 한심하기는. 그 지난한 재앙을 거치면서도 학습하는 것조차 미진한 자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으며, 삶의 한순간 한순간에 충실하지 않는다면 끝나는 순간까지 괴로운 것이다. 스스로 죽음의 시점을 선택할 수 없으니 그저 미루는 것이 아니냐?
떠나는 자를 정리하는 시간은 없고, 북을 치고 슬픔을 그 음율 아래로 밀어 넣는 것뿐. 그럴 뿐인데 어찌 그리 요란한지 모르겠군. 늘 눈살을 찌푸리게 해.
관을 두고 원을 그리는 춤. 시작과 끝은 한 곳에 있고, 그 안에는 꽃 속에 파묻힌 죽음이 있지. 바닷바람에 천이 나부꼈다. 그 사이로 노래와 박수 소리, 빈 공간을 내버려두지 않는 끝없는 이야기들이 강처럼 흐르지. 영웅이 떠나기에 이토록 어울리지 않는 끝이 있겠는가? 생명이 떠나기에 이토록 어울리지 않는 순간이 있었겠나? 애도는 엄숙해야 하며, 슬픔은 성숙하게 나눠야하는 것임에도.
네가 바라는 것은 이 같잖은 연극에도 기꺼이 어울리는 것이겠지. 그럴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지켜보는 정도는 할 수 있지. 이 모든 것에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더라도……. 너를 사랑한다고, 당신이 별의 바다로 떠나는 길을 축복한다며, 우리의 영웅이라는 말로 술잔을 들어 올리고 꽃을 관에 내려놓는 모든 것들을 용인하는 한이 있더라도.
영웅이 없어도 세상은 움직인다. 해가 뜨고 달은 지며 여전히 너희는 싸우고 증오하고 사랑하고 태어나고 죽어가지. 네가 없다고 다를 것도 없었다. 집 안에 먼지가 쌓이고, 찻잎이 향기를 잃고 종이가 천천히 삭아 들어갈 뿐이지. 새삼스러울 것 없는 시간이다.
우리는 수많은 동포를 잃고 긴 시간을 보냈다. 네가 우리를 별의 잔해 속에서 부르고, 나를 별의 바다에서 끌어내리기 전에도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일이었으니. 하지만 계절이 유수처럼 흐르고 있다면. 그래서 살점과 피로 빚은 육체를 가지고 남겨진 자가 이 땅에 있을 때.
그를 부른 자로서, 너는 내게 해야 할 말이 있지 않나?
세계가 열넷으로 쪼개진 이래 이 삶은 거대한 연극과도 같았다. 혼의 부스러기 같은 것들이 생명을 자칭하며 삶을 구가하고자 했을 때 우리의 기분이 어땠는지 상상할 수나 있겠나? 조각난 세계가 합쳐지는 순간에도 너희는 완전에 다가설 줄 모르고, 존재 자체는 끝없이 우리를 모욕하기만 했지. 우리의 동포는 어디로 갔는가? 너희가 우리의 희생 위에 쌓인 반석에서 생을 누린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다. 행위와 감정과 의지 모두가 닮은 것이 하나 없었으니까. 그러면서도 전쟁과 고통 속으로 스스로를 매몰시키니까!
하지만 네가 하이델린의 의지를 잇고 다음을 제창했을 때 나는 옳음의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했다. 패배했음을 안다. 그 열패감 속에도 네게 왔다. 그런데 이렇게 떠난다고?
공교롭다고 생각하지 않나? 어째서 그 땅이었지? 어째서 이 계절이었으며, 어째서 네가 태어난 날과 가까웠나? 시위라도 하는 거냐? 기어코 별의 바다에서 나를 끌어내 놓고, 멋대로 떠나는 것으로 복수라도 하겠다는 건가? 너는 내 반대편에 서는 것에는 미련이 없지 않았던가. 그것으로는 부족했나?
그 창백한 눈송이 사이로 어울리지도 않는 붉은색을 치장하듯 뒤덮고서. 가장 먼저 달려온 내게 하는 말이란 것이 ‘이 세계를 너무 미워하지 말아달라.’라니. 그런다고 내가 동포 없는 땅에 애정이라도 가질 것 같았나. 수많은 상실 속에 마침표를 찍은 주제에 그러기를 바랐나?
이제 이 새벽은 냉기만을 남기고 지는데.
그러나 그것이 네 부탁이며. 에메트셀크는 없고, 페렌네가 남아있으므로.
이 위에 아씨엔으로 인한 어떤 환난도 없었음을 증거하겠다.
푸른 새벽이 온다. 몇 가지 문장을 제하면 이 편지는 전달되지 못하겠지. 네가 나를 긍휼히 여겨 떠나지 못한 채 지켜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야. 별의 바다에 녹아들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다면 말이지. 그렇다면 뻔뻔하게 나를 부른 것은 너이니 나를 환대하는 것이 좋을 거다. 그리고, 네가 영민하지 않은 것은 알지만 마지막 문장만은 기억해 둬라.
위대한 영웅, 별의 바다로 떠난 여행자, 하이델린의 뒤를 이은 의지의 화신이여.
나는 그런 것 따위는 상관없다.
하이델린의 법칙 아래에서 네 부름을 거부하지 않았을 때부터.
친애하는, 첼레에게
별의 바다로 떠나는 망자의 왕으로부터
다음을 언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