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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mbomb88888
2024. 1. 6. 00:55Love Nonetheless
세레스테가 죽는다. 까닭은 매번 다르다. 내가 솔 조스 갈부스의 이름으로 처리한 수많은 침략 전쟁 계획서 중에는 마도성 프라이토리움의 최종결전 승인서도 있었다. 금박의 서류에 붉은 직인을 찍는 순간 세레스테의 빨간 피가 쏟아져내려, 그녀의 일신과 함께 에오르제아 전대륙이 잿더미가 된다. 용시전쟁을 이끄는 사룡의 송곳니에 꿰뚫려 너덜너덜 늘어진 그녀의 모습은 처참하다. 식민 지배로 제국병이 들끓었던 동방의 성채가 무너질 무렵 그녀는 손쓸 도리 없이 거대한 폭발에 휘말린다. 내 계획이 실패했던 13번째 거울 세계의 어둠에 깊이 잠식된다. 반대로 계획이 성공한 제1세계에서 빛과 절망을 토하는 대죄식자로 변질되기도 한다. 머나먼 엘피스의 나날로 거슬러 올라간 그녀는 사나운 창조 생물에게 심장을 찔리기도 하고, 메테이온을 지키려던 헤르메스의 손에 쓰러지기도 한다. 우주 끝에서 종언을 노래하는 새에게 짓눌려 무너지기도 한다. 그렇게 그녀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나를 두고 죽는다. 나를 혼자 버려두고 죽는다.
하늘이 노랗다는 말은 결코 비유가 아니다. 가장 오래된 마법사의 권능은 천계의 빛깔따위 예사로 바꾼다. 노란 하늘은 파랗게 질리고 하얗게 이울다가 마침내 종말의 붉은색으로 물든다. 유성이 떨어지고 비명이 넘친다. 별의 이치는 이다지도 간단하게 지저분한 원망으로 일그러지는 것이다. 그녀 죽음의 많은 원흉이 되었던 나 자신을 찢어발기는 마음을 하늘에 덧그린다. 모든 재앙을 나의 뜻대로. 나의 증오로 세상이 검게 썩어간다.
저주한다. 세레스테가 없는 이 세상을. 그녀 없이 나 홀로 남겨진 이 세상을.
내 뺨을 가득 적신 것은 눈물인가, 피인가.
번뜩 눈을 떴다. 그곳에는 아주 가까이 눈을 감은 세레스테가 있었다. 눈송이 거친 보름달 달빛이 유리창을 통해 그녀의 창백한 피부를 은은하게 비췄다. 나는 혹시나 하고 간절하게 그녀의 그림자를 지켜보았다. 그녀의 어깨가 올라가고, 다시 내려갔다. 세레스테는 살아 있다. 지금 이 순간 그것만이 나에게 중요했다.
너무나도 안도한 나머지 한숨이 나왔을까. 보라색과 하늘색의 옅은 오드아이가 천천히 빛을 찾아 동공을 크게 키웠다. 이른 시간에 깨워버린 탓에 미안한 기분도 잠깐, 솔직히 나는 안도했다. 이로써 마음껏 그녀의 존재를 실감할 수 있다. 어쩌지도 못했던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따뜻하다. 분명히 살아 있다. 졸린 눈이 꿈뻑이며 나에게로 초점을 맞췄다.
“깨웠네.”
“괜찮아.”
나의 목소리는 비교적 평범했으나 세레스테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았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키는 그녀의 뺨을, 광대뼈 부근을, 눈두덩이를 매만졌다. 부드러운 감촉에 손가락이 그만 풍덩 빠져들 것만 같았다. 그녀는 한쪽 눈만 뜨고서 나를 유심히 관찰했다. 세레스테는 언제나 기민하게 나의 기분을 파악하곤 했다.
“안 좋은 꿈이라도 꿨어?”
거울을 보지 않아도,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지금 내가 불안해 보일 거라는 건 스스로 인지하고 있다. 이런 느슨한 모습은 세레스테 앞이 아닌 이상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 역시 마찬가지로 상처가 아플 때면 나에게만 드러냈다. 우리는 기대고 기대어 언제 비껴날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균형 속에 지내고 있다.
“……가을에 기억나? 바다에 갔던 날.”
나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거꾸로 물었다. 그녀는 내가 어물쩍 넘어간 걸 알아도 기꺼이 속아줬다. 고개를 끄덕이며 기억난다고 속삭였다.
이제 막 겨울을 앞둔 가을날의 라노시아 해변은 제법 쌀쌀했고 하루 종일 먹구름이 껴서 햇빛 한 줌 비추지 않았다. 왜 그런 날에 바다를 갔느냐하면 세레스테는 이때까지 세상을 구한다고 달려온 탓에 그간 하지 못했던 취미 생활을 만끽하느라 관광할 때를 놓쳤다고 대답할 것이고, 나는 한동안 지겹게 내리던 비가 간신히 멎어 시간을 낸 거였다고 대답할 것이다. 날씨가 차고 해가 어두워도 둘이 있으면 안락했다.
세레스테는 그날 전망 좋은 자리에 앉아 독서를 즐겼다. 해변가에서 연금술 연구에 좋은 재료를 발견한 나는 그녀에게 손짓해 불렀고, 그녀는 재밌게 읽던 책을 덮어 놔두고 나에게로 달려왔다. 희귀한 소재를 얻어 기뻐하던 그녀는 자리로 돌아와 얼어붙었다. 책이 사라진 것이었다. 아무리 주변을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빈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몹시 분해서 집에 돌아가는 내내 주먹을 꼭 쥐었다. 나는 또 사면 된다고, 다른 책을 읽으면 된다고 위로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면 안 돼.”
그녀는 그 책을 고집하는 이유를 특별히 밝히지 않았다. 나 역시 굳이 묻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마음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이 땅에 종말이 찾아와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세레스테에게 에메트셀크라고 이름 불리우던 시기까지, 나는 별의 이치를 세우기 위해 희생한 동포들의 못 다한 이야기를 갈망했다. 나는 정당한 인류가 반절의 몫을 빼앗겼다고 줄곧 생각했다. 나머지 반절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우리의 반절이 아니면 안 됐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외에 다른 가능성이 있다고 당당하게 증명한 것은 세레스테였다.
그녀가 가을날 해변에서 그러했듯 다 읽지 못한 이야기는 쉽게 씻어내지 못할 미련을 남긴다. 사람의 이야기는 별의 생명을 이을 정도로 강력하고 방대하다. 단 한 사람 분의 이야기라도 전부 읽지 못하고 떠나보낼 수밖에 없다면 얼마나 한스러운가. 하물며 그것이 사랑했던 사람이라면.
아씨엔이라는 큰 틀에서도 고독은 존재했다. 세 명의 원형은 각자의 방향으로 통합을 요원했고, 얼핏 협력하더라도 방식의 차이 때문에 내실 갈라져 독자적으로 움직이곤 했다. 하늘 사도는 윤회자를 이해할 수 없었고, 윤회자는 원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소울 크리스탈로 기억을 잇는다 한들 완전한 계승은 불가능했고 조디아크의 마력을 부릴 수 있다 한들 그 동포의 이름이 아닌 자리로밖에 부를 수 없었다. 나는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소울 크리스탈만큼은 아무에게도 빼앗기지 않도록 가슴 깊이 담아 두었다. 아젬의 이야기는 결코 이어질 수 없었고 나는 죽도록 아팠다.
세레스테는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뻔히 아는 해변의 일도, 쓸데없이 장황한 말도 전부 들어주었다. 나는 그녀의 뺨을 감싸고 이마를 맞대었다. 우리의 숨소리가 차근히 겹쳤다. 너도 나처럼 눈을 감고 있을까. 이슬 젖은 물망초 같은 눈동자를 너는 숨기고 있을까.
“나는 두렵다. 네가 날 두고 별바다 너머로 사라질까 봐.”
너의 이야기는 아직 많이 남아 있잖아. 조금 더 보고 싶다. 아직은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 너라는 책을. 정말이지 너 아니면 안 돼.
세레스테는 이마를 떼고 나의 턱에 손을 대어 끌어올렸다. 그녀의 눈에는 모순적으로 슬픔과 기쁨이 동시에 녹아들어 있었다. 하데스, 그녀는 입속말로 내 이름을 불렀다. 높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산들바람에 나부끼는 들꽃처럼 가녀리고 어여뻤다. 그러나 그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외였다.
“미안해.”
대체 무얼? 나는 뺨을 쥐었던 손을 내리고 그녀의 어깨를 살짝 잡았다. 섣불리 이상한 소리를 하면 꽉 잡고 흔들지도 몰라. 나로부터, 종말로부터, 수도 없이 많은 재앙으로부터 몇 번이고 별을 구해낸 이 사람은 종종 스스로를 낮잡는 말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깨를 잡고 깊게 눈을 들여다보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그녀가 스스로 깨닫고 알겠다며 인정할 때까지.
“우리는 불완전해서…… 불완전한 나라서.”
세레스테는 말했다. 불완전한 인류이기에 하데스 당신을 불안하게 만드는 거야. 훅하고 사라질 듯한 미소를 지으며 사과하는 그녀는 미려하고 미련했다. 내가 부정하고 따지기도 전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 책은 내가 모험을 막 시작했을 무렵에 처음 읽었던 책이야.”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너덜너덜 헤어져서 어디 내놓으면 책이라고 부르기 부끄러울 정도였다고 그녀는 말했다. 자못 그리운 얼굴이었다. 그녀는 다른 모두를 밀어내고 거리를 뒀을 때 오로지 그 책에 의지해 밤을 보냈다고 했다. 판본은 얼마든지 있고 내용은 토씨 하나 전부 외웠지만 품에서 한 번도 놓지 않았다. 그 소중한 물건을 라노시아 해변에서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나는 불완전하기에 한 사람 몫을 채 못하고 그런 것에 집착하고 마는 거겠지. 그런 미흡함이 당신을 불안하게 하는 거야.”
내가 반박하기 위해 입을 열자 그녀가 손가락으로 나의 입술을 눌렀다.
“나는 오히려 내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두려워. 당신이 날 두고 내 손에 닿지 않는 곳으로 떠날까 봐.”
세레스테의 목소리는 쓸쓸하고 덧없어 당장이라도 스러져도 이상치 않았다. 나는 팔을 뻗어 그녀를 품에 안았다.
“여름에 봤던 불꽃축제, 기억해?”
“응.”
“그때 내가 뭐라고 했지?”
“……불완전하지만 아름답다고.”
폭죽놀이를 만들고 즐기는 사람들은 옛 사람처럼 별을 위한 공헌따윈 생각하지 않는다. 폭죽은 단 한 번 화려하게 빛나고 사라질 뿐이었다. 그것이 완전하다면 영원토록 피어나 밤하늘에 박제됐겠지. 다만 그저 아름다운 데에 그치는 한 순간의 불완전한 불꽃. 이렇듯 불완전한 인류는 과거의 완전한 인간이 도달하지 못한 길에 다다랐다. 그러니 그 자체로도 괜찮다. 에메트셀크였던 나는 그렇게 판정한다.
“그러니 첼레, 너도 마찬가지야.”
어깨에 기댄 그녀의 입술이 살그머니 호를 그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를 껴안는 그녀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우리는 서로에게 매달리듯이 애절하게 끌어안았다.
“……나 쉽게 죽지 않아.”
당연한 말이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강하니까. 하지만 이렇게 직접 듣는 건 차원이 다르게 안심됐다.
“만일 그러더라도, 당신을 찾아갈게. 다음 삶에서든, 어디서든.”
나는 그녀를 부서지도록 끌어안으며 목 언저리에 얼굴을 묻었다. 보드라운 살갗의 달콤한 향기가 핏빛 악몽을 녹여주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어린아이를 어르듯 나의 등을 톡톡 토닥였다. 애 취급하지 말라고 화를 내야 하는데, 좀처럼 그럴 수 없어 울컥했다.
굳게 닫힌 그녀의 마음을 열고 침입해 들어간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고 했다. 나는 그녀가 있어 과거의 사랑을 닫아 덮고 그녀를 별바다 직전의 종점으로 삼고 있다.
그래, 두려움으로 점점이 채워진 우리의 사랑. 나는 너의 처음, 너는 나의 마지막. 한없이 이어져 이윽고 끝이 오지 않도록 남을 만큼의 키스를 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