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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당신을 위하여
2024. 1. 26. 18:29...조금 늦었지만 어쨌든 새해잖아. 당신은 새로운 목표, 없어?
저녁으로 나온 꿀 뿌린 크로크무슈. 꽤나 좋아하는 메뉴인데도 포크질이 제법 느리다 했더니, 아이페가 다짜고짜 질문을 함. 이렇게 밑도끝도 없는 질문에 바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데스는 무어라 말하는 대신, 가볍게 눈썹을 움직여 보임.
신중한 성격답게 아이페가 천천히 말을 이었음. ...오늘, 모두를 보고 왔잖아. 다들 올해 세운 계획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더라. 쿠루루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싶다고 하고, 알피노는 요리를 배워서 직접 제국인들과 나누고 싶다고 하고. 그리고... 이어서 어찌 보면 시덥잖은 이야기가 계속됨.
그런데, 내 차례가 되니까... 할 말이 없는 거야.
아이페가 포크를 쥔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감. 아, 그런 문제였던 건가. 하데스는 턱을 괸 채로 그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음. 이에 힘을 얻었는지 아이페가 다시 입을 열었음. ...세상을 구했잖아. 당신의 마음도... 얻었잖아. 이 이상으로 무엇을 꿈꾸고 설계해야 할지... 나는 모르겠어. 조용한 목소리로 짧은 고백이 끝남.
이전에는? 비슷한 것을 구상해본 적이 없나? 하데스가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기더니 질문함. 아이페는 잠시 침묵했음. ...온전히 내가 '선택'해서 세운 계획이라면, 없어. 어느 순간부터 내 인생은... 내가 의도하는 대로 흘러간 적이 없으니까. 정신을 차려보면 그 다음 목적지가 끊임없이 이어졌으니까... 그리고 말끝을 흐렸음. 아이페는 그동안 하데스와 함께하면서, 진정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왔음. 이번에도 그가 어떤 가르침을 해 줄 거라고 기대하는 모양인지, 하데스의 금빛 눈을 응시하고 있었음.
......
면박이든 충고이든 곧바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였음. 하데스는 오래도록 입을 다물고 있었음. 아이페의 무표정은 그의 앞에서라면 허물어진 지 오래였기에, 의아하다는 듯한 낯이 됨. ...세계의 통합이라는 목표를 세웠던 것이 벌써 만이천 년 전이다. 하데스가 드디어 말문을 뗐음. 그 계획만을 위해 살아왔다 보니, 놓아 준 지금은... 딱히 제시할 만한 게 없군. 별일 아니라는 듯이 하데스는 자신 몫의 빵을 마저 먹었음.
하지만 적어도 아이페는 예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음. 그게 어떤 사소한 요소이든 간에 그랬으니, 일순간 떠오른 고민이 쉽게 스러질 리 없었지. 식사와 정리를 마치면서도, 아이페는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음. 하데스 또한 굳이 입을 열지 않았으니 고요함이 이어졌음. 어차피 침묵이 자리한다고 해서 어색할 사이도 아니긴 했음.
...있잖아. 나는...
아이페가 드디어 말을 꺼낸 것은, 여느 날처럼 잠자리에 누워 그의 품에 안겼을 때였음. 여린 목소리가 또박또박 이어짐. 조금 더, 주체적인 내가 되고 싶어. 하데스에게 실로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아이페이기에, 더없이 의외인 말이었음. 하데스 역시 예상하지 못했을지도 모름.
당신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야. ...그저, 언젠가 당신이... 나에게 화를 냈잖아. 스스로 '선택'하며 살아가지 않는다고.
...그랬지.
...나는... 그런 점에선 당신이 보기에, 여전히 한심한 사람일 거야. 그렇지만... 그 먼 고대에서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인정했을 때부터... 나는 나도 모르게, 여러 선택지를 스스로 골라가며 살아왔어. 이런 나라고 해도... 더 변할 수 있을 거란 뜻이야. ......그러니까, 이게 나의 새로운 목표야.
곧이어 마지막으로 이어진 말은 일렁이는 눈동자와, 희미하게도 옅은 미소와 함께였음. 더는 당신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거든. 하데스는 말없이 커다란 손을 들어 아이페의 머리를 쓰다듬었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눈동자가 아이페를 정면으로 바라봤음.
그런 것치곤 여전히 나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목표이군.
어쩔 수 없잖아. 결국 이게 나니까.
그 언제부턴가 얼음과도 같던 완벽이 깨지고 드러난 어리광. 아이페는 그것을 부리듯 하데스의 품에 얼굴을 묻었음. 한동안 두 사람은 또다시 어떤 말도 없었음. 이윽고 먼저 서두를 꺼낸 것은 하데스였음.
나 역시 생각해봤다. 나는...
너에게 조금 더 내 마음을 표현하고 싶군. 이 역시 하데스가 할 만한 말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아이페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음. 그런 아이페를 내려다보며 하데스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음.
너는 언젠가 나를 두고 별바다에 가겠지. 그때가 되면... 지금의 순간들이 후회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옛날의 이야기가 되어버린 고대에서, 소테리아에게 끝까지 마음을 전하지 못했던 하데스였음. 어쩌면 그렇기에 새로운 목표로서 이게 떠올랐을지도 모름. 소테리아는 아이페이온이 아니지만, 그렇게까지 마음에 남을 일은 두 번 다시는 만들고 싶지 않았음. 그리고...
네가 그것을 바라잖아?
하데스의 목표 역시, 그 끝은 결국 아이페였음. 얼마간의 침묵 끝에 아이페는 가냘픈 목소리로 작게 웃었음. 정말 바보같아, 우리. 하데스 역시 이를 굳이 부정하지 않았고, 아이페의 따뜻한 온기가 조금 더 가까이 그를 감쌌음. 하데스는 그런 아이페의 머리를 쓸어넘기고, 등을 토닥여 주었음.
...할 수 있겠지, 우리?
못 그럴 건 또 뭐야? 세상을 구한 영웅과, 에메트셀크의 좌에 올랐던 옛 사람이다. 이루지 못할 일이라는 것은 없어.
나를 위한 목표이기에, 이윽고 당신을 위한 것. 두 사람의 새로운 소망은 유치할 정도로 서로의 것과 닮아 있었음. 하지만 애초에 마냥 어렵게 생각할 만한 주제도 아니었음. 두 사람의 밤은 그렇게 느리고 달콤하게 흘러갔음. 설령 정답이 아닐지라도, 스스로 만족스러운 해답과 함께. 두 사람은 앞으로도 함께 걸어나갈 테니까.